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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EA 역사상 최대, 비축유 4억 배럴을 풀어야 할 만큼 심각한 상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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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12일 | 에너지·지정학 위기와 한국 경제
4억 배럴. 숫자만 들으면 감이 잘 안 올 수 있다. 리터로 환산하면 약 636억 리터, 올림픽 규격 수영장 2,500만 개를 채울 수 있는 양이다. IEA(국제에너지기구)가 1974년 설립 이래 52년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이 정도 규모의 비축유를 시장에 쏟아부은 적이 없다. 어제(11일) IEA 32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결의한 이 숫자가 지금 우리가 처한 에너지 위기의 심각성을 숫자 하나로 말해주고 있다.
한국은 이 중 5.6%에 해당하는 2,246만 배럴을 방출한다. 걸프전 때 494만 배럴, 러-우 전쟁 때 두 차례 합쳐 1,165만 배럴을 풀었던 것과 비교하면 차원이 다른 규모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어제 직접 한국석유공사 구리지사 지하저장공동까지 찾아가 현장 점검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게 단순한 국제 공조가 아니라 국가 비상 상황이라는 인식을 보여준다. IEA 회원국 전체 석유 소비량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산정된 물량이지만, 솔직히 비축량의 상당 부분을 한 번에 토해내야 한다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다.
배럴당 67달러에서 119달러까지, 12일간의 폭주
2월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습하기 직전까지 WTI 유가는 배럴당 67달러 수준이었다. 그해 초까지만 해도 60달러 안팎에서 안정적으로 거래되고 있었고, 유가 전망에 관한 한 시장은 비교적 평온했다. 공습 소식이 전해진 직후 75달러까지 튀어 올랐고, 이란 혁명수비대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를 선언하면서 유가는 본격적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쿠웨이트 국영 석유회사 KPC가 '불가항력'을 선언하며 생산을 줄이고, 카타르 가스 시설까지 공격받으면서 에너지 가격은 하루 단위로 기록을 갈아치웠다.
3월 첫째 주에는 WTI가 주간 기준 35.6% 급등했고, 브렌트유는 27% 올랐다. 그리고 3월 9일, WTI 선물이 장중 119.48달러를 찍었다. 2022년 7월 이후 처음으로 100달러를 돌파한 것은 물론이고, 12일 만에 75% 넘게 뛴 셈이다. 브렌트유도 같은 날 111달러를 넘겼다. 내가 기억하는 한 이렇게 짧은 기간에 유가가 이 폭으로 치솟은 건 2020년 코로나 직후 반등기를 제외하면 유례를 찾기 어렵다. 다우존스는 3월 2일 하루 만에 400포인트 넘게 빠졌고, 아시아 증시도 일제히 급락하면서 에너지 쇼크가 실물 경제로 번지기 시작했다.
WTI 유가 추이 — 2월 27일 67달러에서 3월 9일 장중 119달러까지 폭등한 뒤, IEA 비축유 방출 결의 소식에 87달러대로 하락호르무즈 해협이 왜 이렇게 중요한가. 이 해협은 페르시아만과 오만만을 잇는 폭 55km짜리 좁은 수로인데, 대형 유조선이 실제로 통과할 수 있는 구간은 고작 3.2km에 불과하고 그 전 구간이 이란 영해다. 세계 석유 해상 교역의 20~30%, LNG 해상 운송량의 5분의 1이 여기를 지나간다. 에너지 전문가들이 '초크 포인트(숨통)'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다. 좁은 목을 조르면 몸 전체가 질식하듯, 이 해협이 막히면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 전체가 숨을 못 쉰다.
이란 혁명수비대 에브라힘 자바리 소장이 "통과하는 모든 선박을 침몰시키고 유가를 배럴당 200달러까지 올리겠다"고 공언한 건 허세가 아니다. 유조선 2~3척만 가라앉히면 물리적으로 해협이 마비되는 지형적 현실에 기반한 위협이고, 해상보험사들이 이미 보험 인수를 전면 중단했기 때문에 설사 배가 있어도 보험 없이 항해할 선사는 없다. 전쟁 전 하루 138척이 오가던 해협을 현재 통과하는 선박은 이란 유조선과 중국 벌크선 단 2척뿐이다. 통행량 90% 급감. 사실상의 봉쇄 효과가 이미 실현된 것이다.
대체 경로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아랍에미리트는 아부다비에서 오만만까지 370km 송유관을 갖고 있고, 사우디는 페르시아만에서 홍해까지 1,200km 수송관을 운영 중이다. 하지만 이 두 경로를 합쳐도 하루 350만 배럴 수준으로, 호르무즈를 통해 이동하던 하루 1,500만 배럴의 4분의 1도 안 된다. 우회 루트의 수송 비용도 50~80% 뛰는 상황이라, 구조적으로 대안이 없다고 보는 게 맞다.
IEA가 52년 만에 최대 카드를 꺼낸 이유
IEA의 비축유 방출 역사를 쭉 놓고 보면 이번이 얼마나 이례적인지 바로 알 수 있다.
1991년 걸프전 때 2,500만 배럴이 처음이었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 6,000만, 2011년 리비아 내전 때 6,000만, 가장 최근인 2022년 러-우 전쟁 때조차 두 차례 합쳐 1억 8,270만 배럴이었다. 이번 4억 배럴은 직전 최대 기록의 3.3배다. IEA 전체 비축량 12억 배럴의 3분의 1을 한 번에 푸는 것이다.
IEA 비축유 방출 역사 — 2026년 이란 전쟁 대응은 직전 최대 기록(러-우 전쟁)의 3.3배, 걸프전의 16배 규모파티 비롤 IEA 사무총장은 "현재 직면한 석유 시장 도전은 규모 면에서 전례가 없다"고 밝혔고, 비축유 방출이 "즉각적인 완화를 위한 것"이라며 호르무즈 해협 통행 재개를 촉구했다. 솔직히 나는 이 발언이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진단이라고 본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석유제품 수출량이 전쟁 이전의 10% 미만으로 떨어졌다는 IEA 자체 평가가 그 근거다. 하루 1,500만 배럴이 지나가던 길목이 사실상 막혀버린 상황에서, 4억 배럴을 풀어도 봉쇄가 2개월 이상 지속되면 다시 바닥이 보인다.
비축유 방출 소식이 전해지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119달러까지 치솟았던 WTI는 한때 81달러대까지 급락했다가, 오늘(12일) 오후 기준 87달러 부근에서 거래 중이다. G7 재무장관들이 추가 방출 의지까지 밝힌 덕에 심리적 안정 효과는 분명히 있었지만, 시장이 다시 87달러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건 비축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는 뜻이다. 비롤 사무총장이 "특히 항공유와 경유 공급에 중대한 영향"이 있다며 천연가스 시장 상황도 매우 어렵다고 언급한 것처럼, 원유만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 시장 전반이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한국이 특히 아픈 이유는 명확하다
여기서 좀 냉정하게 한국 상황을 짚어보자.
한국의 중동산 원유 의존도는 전체 수입의 **69.1%**다. 이 중 95% 이상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해서 들어온다. 산술적으로 한국 원유 수입의 약 65%가 호르무즈 한 곳에 걸려 있는 셈이다. 이 해협이 막히면 한국이 일본, 중국, 인도와 함께 가장 큰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HD오일뱅크, GS칼텍스 소유 선박을 포함해 한국 관련 선박 26척이 해협 인근에 발이 묶인 채 대기 중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가스 수급도 문제인데,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한국이 전체 LNG의 20%를 확보하는 상황이라 정부 차원의 별도 대책이 필요하다.
한국의 에너지 위기 민감도 — 중동 원유 의존도 69.1%, 호르무즈 경유율 95%, 해협 물동량 90% 급감한국석유공사가 올해 들어 미국산 원유 600만 배럴 긴급 구매 계약을 체결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중동 의존도를 줄이려는 움직임 자체는 맞는 방향이지만, 600만 배럴은 한국 하루 소비량(약 260만 배럴)의 이틀치도 안 되는 양이다. 구조적 전환이라고 부르기엔 턱없이 부족하고, 당장의 수급 완충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다. 미국 재무부가 인도 기업의 러시아산 원유 구매를 한시적으로 허용하는 면허를 발급한 것처럼, 미국 자체도 글로벌 공급을 늘리기 위해 기존 제재를 완화하는 카드까지 꺼내들고 있다.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은 "해상에 제재 대상인 러시아산 원유 수억 배럴이 존재한다"며 "제재 완화로 단기 공급을 늘릴 수 있다"고 했는데, 에너지 위기가 지정학적 제재 질서까지 흔들고 있는 셈이다.
이미 국내 상황은 복합 위기 양상이다.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800원대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고, 원달러 환율이 1,493원까지 치솟아 2009년 3월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유가를 달러로 사서 원화로 결제해야 하는 한국은 유가 상승과 환율 상승의 이중고를 동시에 맞고 있는 셈이다. 코스피도 지난주 월요일 5.96% 폭락하며 사이드카가 발동된 뒤, 화요일 5.35% 급반등, 어제도 반도체주 중심으로 올랐다가 에너지 불안에 다시 출렁이는 등 하루하루가 롤러코스터다. 오늘은 선물·옵션 동시 만기일(네 마녀의 날)이라 장 마감까지 수급 왜곡에 의한 급변동이 나올 수 있다. 외국인 선물 매수 우위(+860억 원)가 유지되느냐, 기관의 5,400억 원 매도가 장 막판 터지느냐가 변수다.
비축유는 진통제일 뿐, 근본 처방이 아니다
내 생각에 시장이 지금 가장 걱정하는 건 비축유 방출 자체가 아니라, 이 비축유가 바닥나기 전에 전쟁이 끝나느냐는 질문이다. 스페인 에너지 장관은 각국이 할당 물량을 방출하는 데 최대 90일이 걸릴 수 있다고 했지만, 호르무즈 봉쇄가 90일 넘게 가면? 그때는 더 이상 풀 기름이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제 Axios 인터뷰에서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며 "공격할 표적이 사실상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같은 날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가장 강력한 공습의 날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쪽은 종전 신호, 한쪽은 확전 신호. 이 혼선이 유가가 81달러와 119달러 사이를 오가는 근본 원인이다. 이란은 미국이 향후 공격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해야 휴전에 응하겠다고 전했는데, 워싱턴이 이 조건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다. 이란의 새 최고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가 혁명수비대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강경 보수파라는 점까지 감안하면, 빠른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다. 오늘 호르무즈 해협에서 선박 4척이 추가로 피격됐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전쟁 12일째에도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악화되는 모양새다.
골드만삭스는 봉쇄가 장기화되면 배럴당 150달러까지 갈 수 있다고 경고했고, 카타르 에너지 장관 사드 알카비도 같은 수준을 언급하면서 "세계경제를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호주 커먼웰스 은행의 조지프 카패소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중동에서 발생 가능한 시나리오 가운데 현 상황이 세계경제에 최악의 악재"라고 단언했다. 150달러가 현실이 되면 한국 휘발유 리터당 가격은 2,500원을 넘길 수 있고, 스태그플레이션 우려가 본격화된다.
결국 앞으로 2~3주가 이번 에너지 위기의 성격을 결정한다.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 통행량이 회복되기 시작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시그널이고, 트럼프의 종전 발언이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느냐가 그다음이다. 일본이 16일부터 민간 비축유 15일분과 국가 비축유 1개월분을 선제 방출하기로 했으니 그 효과도 지켜봐야 한다.
에너지 수입국인 한국의 구조적 취약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국면이다. 원유 수입의 65%를 한 해협에 의존하는 나라가, 그 해협이 막혔을 때 쓸 카드가 비축유 방출과 긴급 구매밖에 없다는 현실. 기름값 걱정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당분간 계속될 텐데, 이 위기가 지나고 나면 에너지 안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주유소에 갈 때마다 리터당 얼마를 찍히는지 한숨부터 나오는 요즘, 호르무즈라는 이름 석 자만큼은 기억해두시는 게 좋겠다.
참고 자료: IEA, 산업통상부, 한국석유공사, 로이터, WSJ, 경향신문, 서울경제, 이투데이, 전자신문, 골드만삭스